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미켈란젤로 메리시 다 카라바조 (문단 편집) == 새 시대를 연 예술가 == 일반적으로 [[화가]] [[미켈란젤로]]로 통용되는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와는 [[동명이인]]이며 1세기 후 태어났으니 그 이름을 땄을 확률이 높다.[* 그래서 그의 풀네임이 언급되는 경우는 거의 없고, 거의 언제나 성명 없이 '카라바조'라고만 언급된다.] 인지도에서는 부오나로티에게 밀리지만 미술사적으로 보면 부오나로티에게 뒤지지 않을 정도로 중요한 인물이다. 카라바조는 다채롭고 화려한 르네상스 회화들과 달리, 어두컴컴한 배경 속에서 중심이 되는 인물들에게 스포트라이트를 비추어 극단적으로 명암이 뚜렷하게 대비되는 키아로스쿠로(Chiaroscuro) 기법의 개척자였으며 그의 회화는 당시 사람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이런 그의 회화 기법은 [[루벤스]], [[렘브란트]] 등 후대의 바로크 화가들에게도 큰 영향을 남겼다. 대표작으로 [[메두사]], [[유딧|유디트]] 등이 있다. [[파일:470px-Medusa_by_Carvaggio.jpg]] 카라바조의 메두사. 피렌체 [[우피치 미술관]] 소장 중. 이후 많은 [[호러]] 매체에 영향을 준다. [[파일:external/www.wga.hu/17judit.jpg|width=640]] 이게 대표작인 "홀로페르네스를 참수하는 [[유딧|유디트]]"[* 최근 같은 주제로 그려진 300년간 실종됐던 카라바조의 또다른 작품이 프랑스 남부 툴루즈에서 발견되었다는 보도가 나왔다. 집주인이 지붕을 수리하다가 발견했다고 한다. 만약 진품이라면 '''1억 3천 5백만 달러'''에 달하는 가치를 갖게될 것이라고.][* 사실 이 작품 이전에도 유디트를 소재로 한 작품은 있었지만 주로 참수가 이루어진 후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들고 있는 유디트가 그려진 것이 보통이었으나, 카라바조가 그린 유디트는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베는 순간을 그림으로 그려낸 최초의 사례다. 이는 후대에 활동한 화가인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의 작품에도 영향을 준다.] 그의 인물묘사는 이상적이고 정형화된 르네상스의 인물묘사와 달리 매우 사실적이고 생동감이 넘치며 역동적인 구도로 생생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또한 그가 그린 예수나 사도의 얼굴은 카리스마와 근엄함이 넘치는 대신 시골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촌부의 얼굴 그대로이며 표정에도 인물의 기분이 그대로 드러난다. 이런 이유로 일부 성직자들은 카라바조의 그림이 신성모독적이라고 비난을 하기도 했다. 카라바조 덕분에 르네상스의 시기가 끝나고 본격 바로크 미술의 시대가 도래한다. 카라바조 당대에는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동명의 거장]]과 더불어 '''미켈란젤로라는 이름은 위대한 예술가로 만들어주는 힘이 있는가''' 와 같은 이야기가 있었을 정도로 인정을 받았다. 하지만 이처럼 엄청난 전환점을 마련한 [[거장]]임에도 불구하고 사생활이 워낙 막장이었기 때문인지 죽은 후에는 거의 잊혀져 버렸으며 그의 이름이 다시 빛을 보기 위해서는 20세기까지 기다려야 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